본문 바로가기
포노사피엔스로 살기/그 남자의 궁금증

미얀마 쿠데타 시위 총정리

by 생독TV 2021. 3. 21.
반응형

현재 미얀마 군부는 쿠데탕 항의하는 시위대에 대한 폭력 진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요 도시에서 집회 장소를 선점한뒤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섬광 수류탄, 고무탄, 물대포를 쏘고 공중을 향해 경고사격까지 하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선봉에 선 시위대를 향해 마구잡이로 체포하면서 사회관계망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전하는 취재기자들까지 주요 표적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군이 국민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청년들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팔에 연락처와 혈액형을 적고 매일 매일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가고 있습니다. 

30년전에 대한민국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21세기 한 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는 미얀마 군이 이런 이유는 미얀마 역사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의 역사와 민족구성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인 버간왕국이 11세기에 등장합니다.  이 통일 과정의 정복전쟁에서 소수 민족들을 흡수를 합니다. 그러다가 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왕국의 통제력이 약해질 때마다 소수 민족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독립을 했습니다.  통일과 독립의 과정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미얀마의 역사느 내전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대가 중요해지고 무력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정착됩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소수민족들의 분쟁을 관리하면서 군부가 세력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아래 지도를보면 미얀마의 민족을 알수 있습니다. 가운데 7개주는 버마족이 사는 지역이고 서쪽의 친족, 라카인족, 동쪽의 까친족, 샨족, 꺄야족, 카렌족, 몬족의 7개의 소수 민족이 있습니다. 소수 민족 다 합하면 14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미얀마가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민족 구성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는 70%의 버마인(불교)과 30%의 140여개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입니다. 그래서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 분쟁이 근대로 오면서 심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영국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처럼 미얀마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영국의 미얀마 국민들의 단합을 원하지 않아 미얀마 식민지배시 민족 차별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때 영국의 식민 지배에 독립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웅산 수치여사의 아버지 아웅 산 장군입니다.

1886년 1936년 1942~1945 1945
영국령 인도에 주로 병합 영국령 버마로 변경 일본 점령기에 괴로정권 수립 일본 패망으로 영국령 병합

아웅 산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영국을 몰아내나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일환으로 동남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에 다시 일본과 싸웁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이 다가올 때 아웅 산은 소수 민족 대표들을 모아 약속을 하게 됩니다.  바로 팡롱협정(1947)입니다. 아웅 산 장군이 소수 민족 대표들과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체결했던 협정입니다. 미얀마의 민족 분쟁을 끝냈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우리의 김구 선생님이 그렇듯 이분도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국민 통합의 실패 후유증은 너무 아픕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전쟁을 겪었듯 미얀마도 민족분쟁으로 민주화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독립과 첫 쿠데타

버마가 독립후 초대 수상은 우 누라는 인물입니다. 첫 민간 정부는 일을 못했습니다. 아웅 산 장군이 약속했던 소수 민족의 독립을 무시하고 소수 민족을 차별했습니다. 특히 불교를 국교로 하며 불교이외의 종교를 탄압했습니다. 소수 민족들의 종교는 모두 버마족의 불교와 달랐습니다. 그래서 소수 민족들이 봉기를 하였고 내전으로 나라가 많이 시끄러워 집니다.  

이 때 아웅 산의 동지였던 네 윈이라는 인물이 1962년 처음으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버마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독재가 시작됩니다. 1962년 뭐가 묘하게 일치합니다. 군이 가진 무력에 정치 권력를 더하게 됩니다. 이 때 쿠데타의 이유로 사회가 불안정하다. 내전을 종식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군이 정치를 해야겠다. 이럽니다.

이때부터 지속적으로 내부의 적을 만들고 국민들을 이간질하고 서로 물어 뜯게 만들면서 사실상 60년 가까이 장기 독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다민족 국가로서 생기는 필연적인 분열이 군부를 지켜주는 창과 방패가 되고 있습니다. 

군부의 경제 독점

무력과 정치권력만으로 부족했나봅니다. 미얀마 군부는 여기에 최종 무기를 장착합니다. 바로 돈입니다. 사회주의로 가겠다고 공산주의 경제를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기업과 시설을 전부 국유화시켜버립니다.  사유 재산들을 군부가 몰수한 다음에 공평하게 다시 분배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주의 독재가 그렇듯이 몰수까지만 하고 분배를 제대로 안 합니다. 국유화가 아니라 군부의 사유화로 전락합니다. 국가의 부를 이런 식으로 군부가 독점을 하게 됩니다. 

미얀마 군부를 따마도라고 부릅니다. 따마도는 국가예산을 틀어쥔 채 나라를 좌지우지해왔습니다. 따마도가 기업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네윈의 사회주의 쿠데타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990년대 군부가 운영하는 두 개의 재벌이 창업해 국영자산의 민영화에 참여했습니다. 미얀마 경제협력과 미얀마 경제지주유한회사가 은행, 광산, 담배, 관광 등에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미얀마경제지주회사는 아예 군인연금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 지도자들과 가족들은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번 민 아응 흘라잉의 쿠데타는 세번째 쿠데타입니다. 미얀마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유는 바로 경제문제입니다. 정치인이 다른 거 못해도 참을만 해도 못 먹고 못 살게 하는 것는 절대 용서를 못하나 봅니다. 부를 독점한 군부는 부자가 되지만 국민들은 가난하게 삽니다. 국민들은 참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88년 8월8일 대규모 시위를 합니다. 1988년에 경제가 혼란에 빠져들고 군부의 억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참다못한 버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군부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를 8888 항쟁이라고 한다. 이 항쟁에서 군대는 수 천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엄청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부의 이미지가 갈수록 악화되자, 소 마웅 장군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평화발전평의회(SLORC)를 구성, 이미지 변화를 꾀했다. 군부는 1989년 5월에 국회 선거를 계획하였고, 국명도 1989년 6월 18일에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바꾸었습니다.

1990년 5월에는 미얀마에서 거의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다당제 선거가 열렸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전체 492석 가운데 392석을 얻는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는 당연히 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고, 국가평화발전평의회는 2011년까지 미얀마를 통치하였다. 1997년 6월 23일에 미얀마는 ASEAN에 가입하였으며, 2006년 3월 27일에는 군부가 수도를 랑군에서 옮겨 ‘왕들의 도시’라는 뜻의 네피도로 천도하였습니다.

2015년 11월 8일에 또다시 총선이 열렸으며, 이는 1990년 이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이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 NLD는 상원과 하원 모두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로인해 국민민주동맹의 지도자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는 것도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국민민주동맹의 상징과도 같은 아웅산 수치는 군부 세력에 의해 법적으로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다고 못박혀 버렸다. 2016년 2월 1일에는 새로운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가 출범하였고, 2016년 3월 15일에는 틴쪼 대통령이 1962년 이래 처음으로 비-군부 출신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2016년 4월에는 아웅산 수치가 특별 신설직인 ‘국가고문’직에 취임하였습니다. 

2020년에 미얀마에서 치러진 총선에서는 집권 여당인 NLD가 군부 정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를 포함하여 여러 군소정당들과 경쟁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상원과 하원에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며 476석 가운데에서 396석을 차지하였다. 통합단결발전당과 군부 측에서는 심지어 2015년 총선보다도 악화된 결과가 나오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전체 476석 중 33석이라는 참담한 실적을 거두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군부는 선거 결과 수용을 거부하였으며, 통합단결발전당은 군부의 감시 하에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선거에 참여한 90여 개 정당들 가운데에서 15개의 정당이 재검표나 재선거를 주장하였으나, 국외 선거 감시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특별히 문제 삼을 만한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군부는 끝까지 선거 부정을 주장하였고, 300여 개가 넘는 선거구에서 8백만 개에 달하는 부정이 발견되었다면서 선거위원회에게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선거위원회 측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별다른 부정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재선거나 재검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국민민주동맹의 승리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재선거를 치른다고 하여도 국민들의 뜻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민간정부가 미얀마 군부의 집권 근간인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부정선거로 몰아가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년간 군부통치를 하고 아웅산 수치를 비리의 범인으로 몰아 구금하여 새로운 선거를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미얀마 쿠데타의 전체적인 상황입니다. 

전세계 최초로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발표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과 평행선 같은 민주화 과정을 걷고 있는 미얀마. 군부는 민간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미얀마의 봄이 오길 바랍니다. 

반응형

댓글